궁금소

중국의 몰락 도시 순위

후니의 궁금소 2023. 12. 12. 22:05
반응형

 

10위, 창춘(장춘)
 
1930년대 일본 제국에 의해 건설된 이 도시는 괴뢰 만주국의 수도였으며, 새로운 수도라는 의미에서 '신경'이라는 이름이 붙어졌다. 파리와 캔버라를 모델로 설계한 이 도시는 중국 최초로 수세식 화장실과 파이프 가스가 대중화되고, 중국 최초로 지하철이 설계되고 지하 배선 및 파이프라인을 사용한 도시였다.
 
건국 이후에도 창춘은 FAW를 비롯한 중국 자동차 기업들 대다수가 위치하여 중국 자동차산업의 수도로 불렸고, 창춘영화제작소라는 영화 기업은 오늘날 중국 50대 이상이라면 누구나 봤을 고전영화를 제작하여 중국 영화 산업의 수도로 불리며 영광은 계속 됐다.
 
하지만 개혁 개방 이후 동북 지방이 전체적으로 경제 발전에서 소외되면서 몰락이 시작됐다. 1990년대 이후 창춘의 자동차 산업은 국가 보조금으로 명맥만 유지하고 있고, 창춘의 소득 수준은 중국 도시 중 하위권이다. 거기에 중국에서 가장 낮은 출산율과 가장 외부로의 인구 유출이 심해, 인구가 해마다 줄어들고 있어 중국의 디트로이트라는 불명예를 얻었다.
 


9위, 쉬저우(서주)
강소성 서북부에 위치한 이 도시는 강소, 산동, 하남, 안휘 등 4개 성의 교차점에 위치해 있고, 동시에 중국 남부와 북부의 전환점이며 운하와 고속 철도가 지나는 지리적 요충지이다. 
 
때문에 쉬저우는 역사적으로 초한의 패권 다툼, 삼국의 패권 다툼, 남북조의 전쟁, 국민당과 공산당의 전쟁 등 200여 차례에 전쟁이 일어난 중요한 도시였다. 당연히 쉬저우는 중국 시대 역사 내내 가장 큰 도시 중 하나였고, 중요한 국가역사도시로 지정되어 있고 오늘날에도 인구가 900만을 넘는 거대 도시이다.
 
그러나 오늘날 쉬저우는 몰락했다. 도시의 주요 산업은 주로 기계 제조, 담배, 석탄, 전기, 중공업 장비 등 오염도가 높고 에너지를 많이 소비하는 산업이다. 그 결과 중국에서도 가장 대기 오염이 심한 도시이다. 게다가 쉬저우를 비롯한 서북쪽 도시들의 치안이 좋지 않아 전국적으로 인식이 좋지 않고 경제 발전 수준도 강소성 하위권에 속한다.
 
이제 서주(徐州)는 강소성 북부 사람을 일컫는 차별적인 멸칭으로 쓰이고 있다. 쉬저우는 마치 강남에서 버림받은 아이와 같다.
 


8위, 하얼빈
 
하얼빈은 19세기 후반 제정 러시아에 의해 탄생했고, 도시 전체가 러시아풍 건물로 가득해 동방의 모스크바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이 도시는 1920년대와 30년대까지 수 만 명의 러시아인, 유대인, 우크라이나인, 벨로루시인 공동체가 존재했고, 34개의 외국 은행이 자리잡은 아시아 제 2의 국제도시였다.
 
그 때까지 하얼빈은 중국에서 가장 현대적인 도시였다. 거리의 가게들은 서양풍으로 가득했고, 중국에서 가장 글로벌한 도시로서 러시아 모피, 영국 모직 제품, 프랑스 향수, 독일 의약품, 일본 면직물, 미국 외국 오일, 스위스 시계, 자바 설탕, 인도 자루, 그리고 전 세계의 건조하고 신선한 음식을 찾을 수 있었다. 호텔에서는 서양식 댄스 파티가 자주 열렸고 사람들은 양복을 입고 중국 최초의 맥주인 하얼빈 맥주를 마시고 유럽식 붉은 소시지를 씹으며 즐겁게 이야기했다.
 
그러나 개혁개방 이후 동북 지방이 전체적으로 쇠퇴하면서 하얼빈도 몰락했다. 이제 소득 수준도 하위권에 출산율도 중국에서 가장 낮은 지역 중 하나이다. 아마 중국인들에게 10대 도시를 물으면 대부분은 하얼빈을 떠올리지 않을 것이다.
 

7위, 우한
 
우한은 청나라 말부터 중국 최대의 공업, 상업 도시 중 하나였으며, 청나라 말 장즈동이 호광을 담당하던 시절 한양제철소(지금의 우한제철소의 전신)가 설립되어 중국 현대 철강산업의 시작을 알렸고 중국 중공업을 선도했다. 
 
19세기 중반부터 20세기 중반까지 우한은 국제 언론에 정기적으로 언급된 국제 도시로 중국의 시카고라는 별명이 붙었으며 산업, 금융, 교육, 기타 문화적 측면에서 중국 최상위권 도시 중 하나였다.
 
중공 건국 이후에도, 우한은 중국 10대 도시 중 하나로, 초기 중국의 중공업을 선도한 중요 도시였다. 그러나 개혁개방 이후, 내륙 도시인 우한은 발전에서 상대적으로 소외되면서 침체가 시작됐다. 이제 이 도시는 중국에서 가장 수질 오염이 심한 도시이고, 코로나바이러스의 진원지로 전 세계적인 이미지도 최악이다.
 

6위, 취안저우(천주)
 
취안저우는 중국 정부가 발표한 24개 역사문화 도시 중 하나이며 중국 '해상 실크로드'의 출발점이었다. 당나라 때부터 주요 무역항이었으며, 송원시대에는 대외무역의 중심지였으며, 마르코 폴로가 이 곳을 '에리트리나'라고 부르며 '동방 최대의 항구'라고 칭송하여 세계적으로 알려졌다. 
 
당시 세계 각지의 사업가, 여행가, 승려들이 이곳에 모여 불교, 힌두교, 마니교, 유대교 등 종교가 유입돼 취안저우의 문화, 예술, 상업이 크게 번성했습니다. 전성기 때 취안저우의 입지는 오늘날 상하이가 중국에서 차지하는 위상에 밀리지 않는다.
 
그러나 취안저우의 국내총생산(GDP)은 이제 중국 30위 안팎이고, 넓은 면적에 비해 인구도 적다. 지난 수 백 년간 취안저우는 지속적인 인구 유출에 시달렸고, 취안저우 출신의 해외 화교 수만 600만 명을 넘는다. 이제 이 도시는 제화업을 빼면 경쟁력 있는 부분이 존재하지 않는다.
 

5위, 카이펑 (개봉)
 
카이펑은 중국 8대 고도 중 하나이다. 카이펑의 전성기는 북송 왕조의 수도로 기능한 168년이다. 송나라는 중국 역사상 경제, 문화, 교육 측면에서 가장 번영했던 시대였고, 당시 카이펑은 중국의 정치, 경제, 문화 중심지일 뿐만 아니라 당시 세계에서 가장 번영하는 대도시 중 하나였다.
 
오늘날의 카이펑의 영광은 역사책에서만 찾을 수 있을 정도로 쇠퇴했고, 1954년 성도로서의 지위 조차 정저우에 빼앗기며 카이펑은 일반 현급시가 되었다. 경제는 더욱 비참하다. 하남성 100대 기업 중에 카이펑에 기반을 둔 기업이 하나도 없다. 
 

4위, 양저우(양주)
 
양저우는 춘추전국시대부터 20세기 초까지 중국 경제 분야에서 언제나 중요한 도시였다.
 
춘추 시대부터 소금산업이 발달하여 서한시대 오왕 유비가 양주를 도읍으로 삼았으며 수당 시대에도 양저우의 영광은 지속됐고, 명청 시대의 양저우 소금 상인들은 양저우를 '세계에서 가장 번영하는 도시'로 만들었다. 
 
그러나 1853년 태평천국의 난이 일어나자 1855년 황하의 수로가 바뀌었고 베이징-항저우 대운하는 폐쇄되었으며 상하이가 양저우를 새로운 곡물과 소금 유통 중심지로 나타났다. 1908년 상하이-난징 철도와 1912년 천진-푸저우 철도가 완공되면서 중국에 대한 양저우의 경제적 지배력이 완전히 종식되었고, 양저우는 국가 경제 및 문화 중심지에서 일반 도시로 몰락했다.
 

3위, 난징 (남경)
중국에 '경'자가 들어간 도시는 베이징과 난징 단 두 개 뿐이다. 이름처럼 난징은 베이징과 함께 남북이경으로 불리며 중국 4대 고도 중 하나이다. 춘추전국시대부터 금릉(金陵)이라 불렸으며, 거의 지속적으로 육조의 수도가 되었다. 
 
그 후 난징은 명청 시대에 베이징과 대척점을 이루며 중국에서 가장 번영한 도시 중 하나가 되었다. 민국 시대에 난징은 다시 한 번 수도가 되었는데, 즉 난징은 2천 년 동안 수시로 수도가 된 극소수의 도시 중 하나였다.
 
그러나 일본의 난징대학살 이후 난징은 한 번도 과거의 영광을 회복하지 못했다. 오늘날 난징은 전립선 질환을 앓는 남자를 보는 듯 하다. 이제 난징의 GDP는 강소성 내에서도 쑤저우와 우시에 추월당했고, 베이징의 GDP는 난징의 3배에 달한다.
 

2위, 시안(서안)
옛 이름 장안, 아마 서양에서 가장 유명한 중국 도시 중 하나인 시안은 한나라부터 당나라까지 800년 가까이 수도로 기능했다.
 
도시의 전성기인 당나라 번영기의 장안시는 인구가 100만 명이 넘었는데, 동로마 제국이 장안에 5번 사신을 보냈고, 페르시아는 10번 이상, 일본은 총 134명의 사신을, 한국은 그보다 더 많은 사신을 파견했다. 
 
비록 송나라 시대부터 시안은 과거의 영광을 잃고 쇠퇴가 시작했지만 중화민국 초기까지도 시안은 서부 지방 최대의 도시였고, 건국 직후에도 중국 10대 도시 중 하나였다.
 
그러나 오늘날 시안의 GDP는 중국 40위 바깥까지 추락했으며, 특히 1인당 소득은 중국 도시 중에서도 하위권으로 위구르의 우루무치에도 추월당했다. 서부 지방에서도 충칭과 청두에 밀려, 오늘날 시안의 영광은 눈 씻고도 찾아 볼 수 없다.
 

1위, 뤄양 (낙양)
 
중국의 오랜 역사에서 송나라 이전까진 낙양(洛陽)과 장안(長庵)의 위상이 절대적이었는데, 이 두 도시에 도읍을 두지 않은 왕조는 위대하다고 할 수 없고, 그렇지 못한 문인들은 위대하다고 할 수 없었다.
 
1954년 중공 건국 초기, 허난성은 성도를 카이펑에서 뤄양으로 옮길지 정저우로 옮길지 논의했는데 당시 이미 정저우가 중원 최대의 교통 도시이자 공업 도시가 되었지만, 낙양을 성도로 삼아야 그 옛 영광을 지킬 수 있다는 이유로 추천된 것이었다. 그러나 결국 낙양은 성도로 지정되지 못했다.
 
그래도 낙양의 산업 기반과 GDP는 오랫동안 중원에서 1위를 차지하고 있었지만, 개혁개방 이후, 특히 1990년대 이후 정저우가 교통, 무역, 물류 요소와 행정 자원 우위로 인해 낙양을 빠르게 앞질렀다. 이제 낙양은 소득조차 딱히 높지 않은 전형적인 중국 지방도시 1일 뿐이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