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금소

일본의 진주만, '나츠시마'

후니의 궁금소 2023. 12. 11. 1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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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 또는 태평양 전쟁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연합함대의 본거지인 트럭(Truk) 환초에 대해 들은 바 있을 것이다. 오늘날 미크로네시아 연방의 추크(Chuuk) 주이다.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벌어지자마자 일본 해군은 신속하게 독일령 뉴기니의 적도 이북 지역(이하 남양군도)을 점령했다. 남양군도의 지리적 중심지인 추크의 더블론 섬은 일본 해군의 행정적 중심지가 되어, '나츠시마'(여름 섬)라는 이름이 붙어졌다.
 
수만 명의 일본인이 정착한 사이판이나 팔라우와 자르게, 트럭 섬은 1940년 기준 일본인 수가 4,000여 명에 불과한 훨씬 작은 정착지였다. 화산섬이었던 트럭은 석호에 둘러 쌓여 있고, 농사가 가능한 평지가 거의 없었다.
 
그러나 트럭의 중요성은 이민 정착지나 경제성에 있지 않았다. 태평양 전쟁 당시 추크는 일본 해군의 중심지가 되었으며 종종 일본의 진주만, 지브롤터 등으로 불렸다.
 

일본 해군의 중심지
트럭의 중요성은 바로 일본 해군의 중심지였다는 사실이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트럭의 나츠시마가 일본 해군의 가장 중요한 기지가 되면서 나츠시마는 그곳에 주둔하는 수 만 명의 일본군의 거주지가 되었다.
 
지리적으로 볼 때 나츠시마는 남쪽으로는 라바울을 중심으로 한 동부 뉴기니 및 비스마르크 제도, 과달카날 전역을, 동쪽으로는 마셜 제도를 지원할 수 있는 태평양 전역의 중심지였다. 북으로는 마리아나 제도 - 보닌 제도 - 일본 열도로 이어지는 축을 이루었고, 이 축의 서쪽에는 필리핀과 동남아시아가 있었다.
 
따라서 태평양 전쟁이 한창이던 1942년부터 트럭은 연합함대의 사령부와 그 주력함이 정박했으며 태평양에서 작전을 벌이는 많은 함정의 보급 기지가 되었다. 동시에 상당한 규모의 비행장이 건설되어 일본군 항공기의 중요한 거점이자 일선 기지로 가는 경유지가 되었다.
 
그 결과, 전쟁이 절정이던 때 트럭에는 각종 함선 및 항공기의 연료보급기지, 정박 시설, 하역 시설, 정비 시설, 군수지원시설을 비롯해 병참 기지가 들어섰으며 전쟁 말기 절대방위선의 주요 거점이 되었다.
 
트럭 섬은 원주민 인구가 부족하고, 평지가 적어 농사에 부적절하고, 별다른 산업이 없었기 때문에 1920년대 내내 일본인 인구가 수백 명에 불과했다. 이 일본인들은 공무원(교사 및 경찰 포함)과 그 가족, 일부 상인, 어부들이었다. 
 
나츠시마에 부두와 정부 청사를 중심으로 건설된 작은 일본인 마을이 있었지만, 1930년 기준으로 그 마을의 인구는 351명에 불과했다. 유흥가도 있었지만, 유흥업소의 여자들은 늙거나 못생겨서 도쿄에서 도태된 여자들이라고 자조하기도 했다고.
 
이 별 볼 일 없던 섬은 1933년 일본이 국제연맹을 탈퇴하면서 오히려 발전의 기회를 얻었다. 국제연맹 위임통치 기간 동안 일본은 이 지역에 해군을 주둔시킬 수 없었는데, 국제연맹을 탈퇴하면서 다시 트럭이 해군 기지로서 부활하기 시작한 것이다.
 
1934년부터 남양청과 일본 해군의 협력으로 그 중 하나가 나츠시마 아래에 위치한 다케시마에 세워졌다. 동시에 남양청의 지원 아래 트럭에서 가다랭이 어업 및 가쓰오부시 생산 산업이 발달하기 시작했다. 이 때문에 많은 오키나와인들이 트럭에 이주해 가쓰오부시 공장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남양군도의 대규모 기업인 남양수산은 트럭지점을 개설해 나츠시마에 부두, 가쓰오부시 공장, 얼음 제조 시설 및 냉장 시설, 창고를 건설했다. 그 덕에 매년 수백 명의 추가적인 일본 이민자가 트럭을 향해 오기 시작했다.
 
1930년 트럭의 일본인 인구는 749명이었으나 1940년 4,128명으로 급증했고, 중심지였던 나츠시마의 인구는 1940년 기준 1,769명까지 증가했다.
 
그러나 이보다도 훨씬 거대한 발전은 1940년대에 이루어졌다. 1942년부터 트럭은 일본 연합함대의 사령부가 위치했다. 1944년까지 1만 4천 명이 넘는 일본 육군이 트럭으로 이동했다. 전쟁 말기 트럭의 일본군과 노동자의 수를 합친 것은 약 35,000명으로 북마리아나 제도나 팔라우와 맞먹는 수준이었다. (많은 한국인 강제징용자 역시 추크로 이동됐다.)
 

마을에 대한 묘사
 
"이 마을은 건설 노동자가 너무 많아서 시끄럽고 정말 싫다." (나카지마 아츠시가 묘사한 1941년의 나츠시마)
 
1940년대 초 트럭의 중심지는 나츠시마에 위치한 "나츠시마정"이라는 마을이었다. 이 마을에는 건설회사 마부치구미의 지부 사무소와 '다케나가 코무텐'의 사무소가 위치했다. 이 건설 회사들은 트럭에 있던 거대한 맹그로브 늪지대를 모조리 매립하여 1만 평 규모의 공원을 건설하고, 섬에 포장 도로를 건설했다. 그 후로 자체적인 택시 서비스가 운영되었다.
 
이 공원에는 스모 대회 및 운동회가 열렸으며 이러한 행사가 열릴 때면 일본인과 추크인 모두 합해 수천 명이 모일 만큼 열기가 대단했다고 한다. 스모 뿐 아니라 영화관도 있었는데 한 해에 약 9,100명의 관객을 받았다. 그러나 이 공원은 전쟁 중 병영지가 되었다.
 
매립된 지역에는 비행장과 병참 시설이 건설되었다. 섬 곳곳에는 대공포가 설치되었다. 항구의 규모는 엄청나게 거대해져서 북쪽에는 50척의 군함이, 남쪽에는 200척의 군함이 주둔할 수 있었다.
 
그 중요성 때문에 나츠시마는 "일본의 진주만", "일본의 지브롤터"라는 별명이 붙었다. 그러나 실제로 나츠시마의 요새화 수준은 빈약했고 대형 전함을 수리할 시설도 없었던 반쪽짜리 요새였다. 그 취약성은 트럭 대공습 이후 트럭이 너무 쉽게 파괴되면서 드러났다.
 


나츠시마에 열린 스모 경기

나츠시마 청년단의 모습
 
이 시기 추크인들은 모두 스모 선수를 꿈꿨다고 한다.
 

나츠시마 일본인의 생활
나츠시마는 급속도로 개발된 만큼 난개발되었고, 비록 나츠시마에 대한 여행객들의 평판은 극도로 좋지 않았지만, 나츠시마는 어떤 물건도 살 수 있는 수십 여 개의 소매점, 택시, 영화관 및 당구장, 사교 클럽과 같은 문화 시설, 아이들이 다닐 수 있는 초등학교까지 대부분의 시설을 갖춰 일본인들은 충분히 편안하게 살 만한 마을이었다. 
 
해군의 삶
1942년부터 1943년 초까지 일본 해군은 의심의 여지없이 추크에서 환상적인 삶을 누릴 수 있었다. 일본 해병들은 이 섬을 마치 휴양지처럼 느꼈다. 선박은 한 달 이상 정박해 있었고, 해병들은 낮에는 해변에서 시간을, 저녁에는 유흥 지구에서 술을 먹고 여자를 즐겼으며, 해군 장교들은 낮에는 테니스를 치고 밤에는 맥주를 즐겼다.
 
비록 이 섬에는 현대적인 숙박 시설이 없었지만, 항구에 정박한 야마토는 그 거대한 크기와 세련됨으로 "야마토 호텔"로 불리었으며 그곳에서 야마모토 이소로쿠 제독과 참모들은 양식 코스 요리와 모듬 생선회를 즐겼다.
 
물론 전황이 악화된 이후론 ... 설명할 필요도 없다.
 

원주민들의 삶
나츠시마에는 1939년 기준 1,366명의 원주민이 살았지만 대부분은 마을 교외에서 거주했고 마을 내에 사는 원주민들은 5~6채의 공동 주택에서 함께 살았다. 
 
원주민들은 일본 국적이 없었고, 일본인과 분리된 학교를 다녀야 하고, 각종 차별 조치가 취해졌다. (야간 통행 금지, 술 구입 금지, 사업 신청 금지, 일본인 여성과의 혼인 금지, 적은 임금 등등) 원주민으로 갈 수 있는 최고 지위는 기껏해야 극소수의 교사나 경찰이었는데 이것조차 일본인 교사, 경찰과는 분리되었다.
 
원주민 학생들은 방과후에는 연습생으로 일본 가정에서 일하도록 보내졌다. 그들은 정원 청소나 간단한 집안일을 하면서 일본어와 일본 문화를 배우고 그 대가로 한달에 2~3엔을 벌었다. 번 돈으로는 빙수, 만쥬 등을 사 먹었다.
 
원주민들은 주로 가다랑어 공장에서 오키나와인들과 함께 일했다. 월급과 함께 참치를 받았다. 일부 원주민은 남양무역과 같은 회사에서 일했으며 평균적으로 12엔의 임금을 받았다. (비교하자면 일본 건설 노동자의 일당은 2.5엔, 오키나와인의 평균 월급은 40엔) 하지만 인장 가게에서 일한 어떤 원주민은 한달 월급이 100엔이 넘기도 했다. 또는 해군 기지 및 비행장 건설 노동자로 일하기도 했고, 상점에서 일하거나, 농장에서 일하기도 했다. 여성들은 종종 일본인의 가정부로 일했다.
 
그런 한편 트럭 원주민들도 다양한 도시 생활을 누렸다. 영화관, 카레밥, 돈부리, 오키나와 국수 등은 값이 매우 저렴했다고 하고, 운동회(오늘날에도 이 지역은 운동회나 축제를 Undokai라고 부른다.)와 스모, 야구는 추크인에게도 아주 인기가 있었다.
 
몰락
1944년 2월, 미국의 트럭대공습으로 해군 시설이 붕괴되었고 트럭의 일본인 마을도 붕괴되었다. 전쟁 중 나츠시마에 살던 일본인들은 하루시마로 소개되었고, 종전 후 미크로네시아 일본인 전체가 일본으로 소개된다.
 
현재 나츠시마는 더블론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이제 이 섬에는 전신국, 영화관, 은행, 병원, 유흥가, 카페 등이 존재하지 않는다. 거리는 무성한 덤불과 나무만 있어 과거의 흔적은 바닷 속에 가라앉은 군함으로만 확인할 수 있다.
 
그럼에도 추크에선 여전히 일본의 지배를 받았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오늘날까지도 추크에는 영어보다 훨씬 많은 수백 개의 일본어 단어가 쓰이고 있으며, 추크에서 가장 흔한 성씨는 일본에서 유래된 모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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