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금소

프리드리히 대왕의 18세기 초 유럽 국가들에 대한 평가

후니의 궁금소 2023. 12. 5. 11:40
반응형
프로이센의 국왕 프리드리히 2세는 오스트리아 계승 전쟁(1740~1748)이 한창이던 1746년에 "내 시대의 역사"라는 역사책을 썼다.
책의 1장에서 그는 당시 18세기 초 유럽 국가들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하고 있는데, 이를 통해 감자대왕이 그 당시 어떤 생각을 가졌는지 엿볼 수 있다.
 


프로이센

 

아버지 프리드리히 빌헬름이 사망했을 때 국가의 수입은 고작 740만 크라운에 불과했다. 인구는 300만 명에 달했다. 고인이 된 왕이 저축한 돈은 870만 크라운이었다. 부채는 없고 재정은 잘 관리되었지만, 산업은 거의 없었다. 무역 수지는 매년 120만 크라운을 잃었고 이는 해외로 전달되었다.

 



오스트리아

 

사부아 공자 외젠이 죽은 후에는 그를 대신할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국가는 용기가 부족했고 나른함과 쇠퇴에 빠졌다. 카를 6세는 좋은 사람이 될 자질은 있었지만 위대한 사람이 될 수는 없었다. 그는 관대했지만 분별력은 없었다. 마음이 좁고 통찰력이 없었다. 부지런했지만 천재성이 없었기 때문에 많은 일을 하면서도 성취한 것이 거의 없었다. 좋은 아버지, 남편이지만 오스트리아 가문의 모든 왕족들처럼 편협하고 미신을 믿는 사람이었다. 그는 명령하기 위해 자라난 것이 아니라 순종하기 위해 자라났다. 그런데도 1740년 오스트리아 제국은 숨겨진 악행과 약점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유럽에서 강력한 강대국이었다. 그동안의 자존심은 힘을 보상했고, 과거의 영광은 현재의 굴욕을 보상했다.

 



프랑스

 

1725년 빈 조약 이후 프랑스는 유럽의 중재자 역할을 해왔다. 프랑스 군대는 이탈리아와 독일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군대는 180개 대대, 각 대대는 6백 명으로 구성되었고, 민병대원 3 6천 명에 더해 전투원 수는 13 400명에 달했다. 해군도 상당한 규모로, 호위함을 포함하여 다양한 등급의 선박 80척을 바다에 투입할 수 있었으며, 이 함대를 위해 최대 6만 명의 선원이 근무했다. 1740년 왕국의 수입은 6000만 크라운에 달했으며 이 중 1000만 크라운은 왕위 계승 전쟁으로 인한 왕실의 부채를 갚는 데 사용되었다. 사회에 가장 유용한 사람들, 즉 백성이라고 불리며 땅을 경작하는 종들은 가난하고 부담이 컸으며, 특히 정복지에서는 더욱 그러했다. 반면 파리의 사치와 풍요로움은 아마도 루쿨루스 시대의 고대 로마의 화려함에 버금갈 정도였다. 이 거대한 수도의 개인 주택에는 천만 개가 넘는 은화가 있었다. 그러나 도덕적으로는 타락했고, 프랑스인, 특히 파리 주민들은 풍요로움과 부드러움에 물든 시바리스 인들과 같았다.

 



스페인

 

스페인 사람들은 열심히 일하지 않기 때문에 유럽에서 그렇게 부유하지 않다. 신세계의 보물은 스페인 이름으로 무역을 이용했던 외국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프랑스인, 네덜란드인, 영국인은 페루와 멕시코를 제대로 즐기고 있다. 스페인에는 토지를 경작할 주민이 충분하지 않다. 치안은 지금까지 방치되어 왔다. 그리고 미신은 이 광신적인 사람들을 야만 국가의 대열에 속하게 만든다. 왕은 2,400만 크라운의 재산을 보유함에도 정부는 빚을 지고 있다. 

 

 

 

포르투갈

 

포르투갈은 유럽에서 설 자리가 없었다. 주앙 5세는 교회 의식에 대한 기괴한 열정으로만 유명했다. 교황의 칙령에 따라 총대주교를 임명할 수 있는 권한을 얻었고, 또 다른 칙령에 따라 봉헌식을 제외한 미사를 집전할 수 있는 권한도 얻었다. 오직 그의 즐거움은 사제, 성당, 수녀원, 군대, 수도사, 정부인 수녀들이었다.

 

 

 

영국

 

유럽의 모든 국가 중에서 영국은 가장 부유했다. 무역은 전 세계를 아우르고, 부는 과도했고, 자원은 무궁무진했다. 그런데 모든 이점을 부여받았음에도 강대국들 사이에서 걸맞는 지위를 얻지 못했다.

 

당시 영국을 통치한 사람은 하노버의 선제후 조지 2세였다. 그는 미덕과 천재성을 지녔으나 정열이 지나치게 강했고, 결심이 확고했으며, 검소함보다는 탐욕스러웠고, 능력은 있지만 인내심이 없었으며, 용감했지만 폭력적이었고, 선거권자들의 이익만을 위했고, 자유를 우상으로 삼은 국가를 이끌기에는 스스로에 대한 숙달이 부족했다.

 

과학과 예술이 이 왕국에 뿌리를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국가 도덕의 잔인함을 약화시키지 못했다. 영국인의 가혹한 성격은 피비린내 나는 비극을 원했다. 그들은 위대한 뉴턴을 배출했지만 화가도, 조각가도, 훌륭한 음악가도 없었다. 

 

런던시는 인구 측면에서 파리보다 20만 명 더 많았다. 삼국의 주민은 약 800만 명에 달했다. 여전히 자코바이트로 가득한 스코틀랜드는 잉글랜드의 멍에 아래서 신음했고, 아일랜드의 가톨릭 신자들은 고등 교회가 그들을 아직도 노예로 삼으며 탄압하는 것에 대해 불평했다.

 

 

 

네덜란드

 

총독제가 폐지된 이후 이 공화국은 귀족 과두정을 취했다. 법률고문은 서기의 도움을 받아 의회에 문제를 제안하고, 외무 장관들에게 알현하고, 의회에 보고한다. 이러한 회의의 심의는 느리고, 너무 많은 대리인에게 전달되기 때문에 비밀은 제대로 유지되지 않는다. 네덜란드 시민들은 총독을 폭정으로 가는 길이라고 생각해 혐오한다. 네덜란드 상인들은 자신들의 이익 외에는 어떤 정책도 갖고 있지 않는다. 정부는 이웃 나라를 공격하는 것보다 자신을 방어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늪지대와 황량한 땅에 이 공화국이 세워졌다고 생각하는 것은 감탄할 만할 일이다. 200만 명의 인구가 상공업의 기적을 통해 부와 풍요를 누리고 있다. 실제로 덴마크와 프랑스 동인도 회사는 무역에 해를 끼치고 있다고 시기 섞인 불평을 했다. 

 

 

 

덴마크

 

프레데리크 4세 때 덴마크는 홀슈타인 가문으로부터 슐레스비히를 정복했고, 크리스티안 6세 때는 천국을 정복하려 했다. 왕비는 남편의 불륜을 막기 위해 신성한 제동장치로 편협함을 사용했고, 루터의 열렬한 추종자가 된 국왕은 궁정 전체를 광신으로 이끌었다. 복음서는 그의 군사 강령이 되었고, 사제들의 음모는 국가에 영향을 미쳤다. 우리는 역사상 경건한 아이네이아스 때에도, 생 루이의 십자군 시절에도 독실한 영웅의 예를 본 적이 없다. 무함마드는 독실한 신자라기보다는 종교를 이용해 제국을 건설하고 지배한 사기꾼에 불과했다.

 

 

 

스웨덴

 

스웨덴은 더는 예전의 모습이 아니었다.  12세의 치세 마지막 9년은 불행으로 얼룩졌다. 이 왕국은 리보니아, 포메른, 브레멘, 페르덴을 잃었다. 리보니아는 스웨덴의 풍요로운 창고였지만 이 지역으로부터 거둬들이던 세수, 군인, 곡물 등을 모두 잃게 되었다. 스웨덴의 인구는 약 200만 명에 불과하지만, 척박한 토양과 뒤덮인 수많은 산은 이 작은 인구를 먹여 살리기에도 부족하다. 리보니아 양도로 스웨덴은 생존 위기에 처했다. 스웨덴 사람들은 그들이 겪은 불행이 무엇이든 칼 12세를 존경했지만, 인간 마음의 상당히 일반적인 일련의 모순으로 그들은 죽음 이후 그에게 분노했다.

 

유럽의 모든 국가 중에서 스웨덴은 가장 가난한 나라이다. 금과 은은 스파르타에서와 마찬가지로 거의 없다. 큰 도장이 찍힌 구리판이 화폐를 대신하며, 이 무거운 것들을 운반하는 데 불편함을 피하기 위해 종이를 대체했다. 스웨덴의 수출품은 구리, , 목재로 제한되어 있고, 무역 수지에서 스웨덴은 수입이 수출을 초과하여 매년 손실을 보고 있다. 스웨덴은 혹독한 기후로 인해 어떤 산업도 할 수 없으며, 거친 양모는 하층민들의 옷에 적합한 품질의 것을 생산한다.

 



러시아

 

스웨덴의 이웃인 러시아는 강력한 세력이다. 북해에서 흑해 연안까지, 남쪽으로는 사모기티아에서 중국 국경까지 광활한 영토가 러시아 제국을 형성하고 있다. 한때 야만적이었던 이 국가는 차르 이반 4세 시대까지 유럽에 알려지지 않았다. 이 거대한 제국의 입법자이자 창시자인 표트르 1세는 이 나라에 질서를 가져오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이 광대한 제국의 입법자이자 창시자였으며, 사람, 군인, 관료들을 만들었고,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세웠으며, 제조업을 부흥시켰다. 그는 상당한 재능을 갖고 있었고 그의 국가와 독특한 능력은 유럽 전역에서 존경을 받게 되었다.

 

제국의 수입은 1,500만 크라운에 달한다. 그 엄청난 규모에 비하면 그 금액은 적당해 보인다. 하지만 모든 것이 저렴하다. 위정자에게 가장 필요한 군인은 유지 비용이 많이 들지 않는다. 러시아군 병사는 1년에 고작 유럽의 다른 강대국이 지불하는 금액의 절반인 8루블만 받고, 아주 싼 값에 식량을 살 수 있다.

 



폴란드

 

러시아의 영향력은 다른 이웃 국가들보다 폴란드에 더 직접적으로 미쳤다. 이 나라는 스타니스와프 가문을 위한 나라였지만 러시아 군대가 국민의 바람을 자기들 입맛대로 바꾸었다. 이 왕국은 영원한 무정부 상태이다. 모두 이해관계에 따라 분열되어 있으며, 공익보다 자신의 이익을 선호하고, 가혹하게 백성을 억압할 때만 단합할 수 있으며, 그들을 사람이 아닌 짐승보다 더 짐승으로 취급한다. 폴란드인들은 허영심이 많고, 사치를 누리고, 역경에 굴복하며, 악행을 저질러 돈을 모으지만, 돈이 생기면 즉시 창밖으로 던져버리고, 경솔하고 판단력이 없으며, 이유 없이 편을 가르고 떠나며, 행동의 일관성이 없어 최악의 일로 돌진하고, 법은 있지만 강제적인 정의가 없어 아무도 법을 지키지 않는다. 

 

의회는 3년마다 그로드노나 바르샤바에서 열린다. 아우구스트 2세 통치 기간에는 평화 의회만 시행되었다. 이런 일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의회에서 단 한 명의 의원이라도 심의를 반대하면 의회를 해산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고대 로마 호민관의 거부권에서 유래되었다.

 



독일

 

독일은 그것을 구성하는 왕선제후군주의 수를 고려하면 강력해 보이지만그것을 분열시키는 상반된 이해관계를 살펴보면 약하다제국의회는 한때의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일종의 유령에 불과하다그것은 실체보다 형식에 더 집착하는 국제법 학자들의 모임이다군주가 의회에 보내는 장관은 달을 향해 짖는 앞마당 개와 같다전쟁 문제가 발생하면 황실은 자신의 싸움을 제국의 이익과 혼동시켜 독일 세력을 야망의 도구로 사용하는 방법을 알고 있다독일에서 허용되는 다양한 종교는 더는 과거처럼 폭력적인 경련을 일으키지 않는다그런 무리는 아직 존재하지만열정은 식었다.

 



작센

 

작센은 독일에서 부유한 지역 중 하나이다. 이는 좋은 토양과 번성한 제조업 덕분이다. 선제후는 600만 크라운의 수입을 얻었고, 그중 150만 크라운은 두 번의 폴란드 선거로 인한 부채를 갚는 데 사용된다. 선제후는 24,000명의 정규군을 유지했고, 국가는 여전히 그에게 8,000명의 민병대를 제공할 수 있었다.

 



바이에른

 

바이에른 선제후 카를 알브레히트는 작센 선제후 다음으로 독일에서 강력한 군주이다. 그의 아버지 막시밀리안 2세 에마누엘은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에서 프랑스 편에 섰고, 회흐슈테트 전투에서 패배했다. 바이에른은 500만 크라운의 수입을 얻는데, 그중 대략 100만 크라운은 작센에서처럼 빚을 갚는 데 사용된다. 프랑스는 선제후에게 30만 크라운의 보조금을 지급했다. 바이에른은 독일에서 가장 비옥한 지역이지만 지능이 가장 낮은 곳이다. 그곳은 짐승들이 사는 지상낙원이다. 선제후의 군대는 황폐해졌다. 그가 황제를 섬기기 위해 헝가리에 보낸 6000명 중 절반은 돌아오지 않았다. 바이에른이 전장에 투입할 수 있는 병력은 모두 12,000명 미만이었다.

 

 

 

스위스

 

독일의 남서쪽으로 가면 독일 민족이 포함된, 자유로운 이 단일 공화국을 발견할 수 있다. 카이사르 시대부터 스위스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지배를 받았던 짧은 기간을 제외하고는 자유를 유지해 왔다. 오스트리아의 황제들은 이 호전적인 산악인들을 복속시키려고 여러 차례 시도했지만, 자유에 대한 사랑과 험준한 바위가 이웃 국가들의 야욕에 맞서 그들을 지켜주었기 때문에 이 멍에는 오래 견디지 못했다. 2년마다 13개 칸톤은 베른이나 취리히의 수장이 교대로 주재하는 총회를 개최한다. 이 공화국에서 베른주는 네덜란드 공화국의 암스테르담시와 같은 역할을 하며, 확고한 우위를 점하고 있다. 스위스의 3분의 2는 개혁교회이고 나머지는 가톨릭이다. 개혁파는 엄격함에서 영국의 장로교와 비슷하고 가톨릭은 스페인의 광신적인 가톨릭과 비슷하다. 이 정부의 지혜는 국민들이 발에 짓밟히지 않고 국가가 허락하는 한 최대한 행복하게 자신의 삶을 마음껏 살 수 있다는 사실에 있다.

 

그들은 중립의 원칙에서 결코 벗어나지 않고, 언제나 지혜를 통해 독립을 유지해 왔다. 이 공화국은 방어를 위해 십만 명의 병력을 쉽게 모을 수 있으며, 그 많은 병력을 3년 동안 뇌물로 매수할 수 있을 만큼의 부를 축적했다. 프랑스에 복무하는 스위스인들이 네덜란드에 복무하는 같은 칸톤의 친척들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는 야만적인 관행으로 인해 현명하다고 평가할 만한 합의가 훼손된 것처럼 보이지만, 세상에 완벽한 것이 어디 있겠는가?

 



이탈리아

 

이탈리아로 내려가면 고대 로마 제국은 제후들의 야망으로 인해 여러 부분으로 나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롬바르디아는 베네치아인, 오스트리아인, 사보이아인, 제노바인이 공유한다. 이 중 사르데냐 국왕의 소유가 가장 크다. 비토리오 아메데오는 이탈리아 정치에 정통하고 자신의 이해관계에 대해 잘 아는 왕으로 알려져 있다. 이 국가의 정책은 합스부르크와 부르봉의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하여 국가를 확장할 수단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나머지 롬바르디아는 앞서 말했듯이 분열 상태이다. 황제는 밀라노를 소유했고, 그의 사위인 로렌 공작은 토스카나에 세력을 확장했다. 제노바는 여전히 은행업과 무역, 아름다운 대리석 궁전으로 유명했다. 코르시카는 제노바에 반발해 반란을 일으켰다. 첫 번째 반란은 1732년 황제가 파견한 군대에 의해 진압되었고, 두 번째 반란은 프랑스군이 진압했다, 불을 완전히 끄지는 못했지만, 외국의 도움으로 한동안 불을 끌 수 있었다.

 

베네치아는 제노바보다 더 큰 도시이다. 이 멋진 도시는 20만 명의 주민이 거주하는 72개의 섬 위에 세워졌으며, 매년 아드리아해와 결혼하는 우스꽝스러운 의식을 치르는 도제가 이끄는 의회가 통치하고 있다. 베네치아에는 배가 있지만 함대를 구성하기에는 충분하지 않다.

 

나폴리는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중 오스트리아의 통치를 받게 되었으나, 1733년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에서 비톤토 전투의 승리로 다시 부르봉 왕조의 카를로스 3세의 통치하에 놓이게 되었다. 그는 이 왕국에서 스페인 여왕의 명령을 수행할 뿐이었다. 시칠리아를 포함한 나폴리 왕국의 인구는 약 400만 명에 달했지만, 국가가 보유한 병력은 1 2천 명에 불과했다.

 

나는 모데나 공국, 루카 공화국, 라구사 공화국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는데, 이는 거대한 그림 갤러리에서 어울리지 않는 미니어처이기 때문이다.

 

1740, 교황은 이제 기독교계의 한낱 첫 번째 주교에 불과해졌다. 과거처럼 더는 정치 문제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문학의 부흥과 종교개혁은 미신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혔다. 성인들은 때로 시성되어 그 쓰임새를 잃지 않았지만, 만약 교황이 18세기에 십자군 전쟁을 설교하고자 했다면 스무 명의 사람도 끌어들이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그저 성직자의 의무를 수행하고 조카들의 재산을 서둘러 벌어야 하는 굴욕적인 처지로 축소되었다. 교황이 1737년 오스만과의 전쟁에 참전한 황제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교회 재산에 대한 십일조를 걷도록 승인하고, 황제가 지배하는 모든 마을에 선교 십자가를 세우도록 한 것뿐이었다, 사람들은 무리를 지어 터키인들에 맞서 신성한 비난을 쏟아내기 위해 달려갔다. 그러나 아무런 영향도 없었다. 비록 러시아에 패배했지만, 오스만 제국은 어디서나 오스트리아에 승리했다.

 



오스만

 

터키인들은 천성적으로 재치있다. 그러나 그것은 무지로 인해 아무 소용이 없다. 용감하지만 기교는 없고, 치안에 대해선 아무것도 모르고, 그들의 정치는 더욱 불쌍하다. 그들이 신뢰하는 숙명론은 모든 불행의 원인을 신에게 돌리고 자신의 잘못을 절대로 바로잡지 않는다. 콘스탄티노플의 인구는 200만 명(이 글이 쓰인 당시 콘스탄티노플의 인구를 백만 명 이상으로 기록한 문헌은 없다)에 달했다. 이 제국의 힘은 그 거대한 규모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을 지지했던 유럽 군주들의 질투가 없었다면 오스만 제국은 더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위 텍스트들은 감자대왕의 글 중에서 주요 부분만 발췌한거고 전문 원본은 

https://friedrich.uni-trier.de/fr/oeuvres/2/toc/text/

에서 읽을 수 있음(프랑스어)

 

한 나라의 군주로서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초연적이고, 반어적이고, 흥겹고, 풍자적이며, 조롱하는 투의 문체가 특징이다.

 또한 18세기 계몽주의자 아니랄까봐 종교혐오적인 태도도 엿보인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