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금소

아시아 최악의 항공참사, 일본항공 123편 추락사고

후니의 궁금소 2023. 11. 15. 1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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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8월 12일. 일본의 추석에 해당하며 일본내 2대 명절로 불리는 오본(お盆)을 맞이해

 

하네다 공항은 고향으로 향하는 귀향객들과 여행객들로 붐비고있었다.

 

기종이 보잉 747SR-46인 일본항공 123편은 승객 509명을 태우고 하네다를 출발해 오사카 국제공항에 착륙할 예정이었다.

 


-사고기 일본항공 123편-

 

JAL123편은 하네다를 출발한 후 예정대로 비행하고 있었다. 이륙한지 12분이 지난 18시 24분. 

 

고도 7300m 상공에서 큰 폭발음이 들리고 항공기관사 후쿠다히로시의 계기판에는 오른쪽 5번째 도어의

 

경고등이 점등된다. 그는 이 도어가 떨어져나갔다고 조종사에게 알렸으며 경고 50초 후 조종사는

 

긴급사태인 스쿽 7700을 발신한다.

 

사고 직후 비행기가 상하로 요동치며 불안정한 상태가 되자 기장은 긴급 강하를 시도하며

 

하네다 국제공항으로 회항을 요청한다. 당시 도쿄 컨트롤에서는 나고야 공항이 더 가까워 그곳에

 

비상착륙이 가능한지 물었지만 하네다의 활주로가 더 길어 안전하게 착륙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인지

 

기장은 하네다에 착륙해야한다고 응답한다.

 



이때 항공기의 맨 뒤에 부착되며 감압을 버텨내는 역할을 하는 벌크헤드가 날아가고

 

수직 꼬리날개가 찢겨 날아가며 항공기의 조종을 위해 쓰이는 유압액이 새어나가 조종불능에 빠진다.

 

항공기의 유압계통은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747의 유압계통은 4개의 채널로 구성하지만,

 

123편은 불행하게도 유압장치 파이프가 지나가는 꼬리날개 4개가 모두 찢겨 나가며 파이프가 모조리 날아가고 말았다.

 



이러한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조종사들은 플랩과 4개의 엔진의 출력을 조정하며 기체를 제어하려 안간힘을 다한다.

 

그러나 한 번 선회를 시도하며 2700m를 내려와 고도 4100m로 비행하며 기체의 불안정성이 증폭되며

 

조종사들은 관제소에 조종불능을 보고한다. 이후 기체는 30분동안 불안정한 상태로 상승과 하강을 반복했는데

 

이로인해 몇몇승객들이 남긴 유서에는 필체가 상당히 휘갈겨진 상태로 적혀있게 된다.

 

-한 승객의 휘갈겨진 유서-

 

이러한 다급한 상황을 듣고있던 요코타 기지의 주일미군은 123편이 비상착륙을 할수있도록 활주로를 비운채

 

구급차와 소방차등을 비상대기시키며 도움을 주려고 했다. 이때 123편은 요코타 기지에 착륙하려 시도했지만

 

갑자기 불어온 남서풍에 의해 후지상 방향으로 좌선회를 해버리고 되었고 여기에 고도를 낮추려 랜딩기어를 내렸지만

 

기체는 한 바퀴를 더 선회하며 필요 이상으로 고도가 낮아진다.

 

30분동안의 승무원들이 피나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123편은 완전히 항로를 이탈해 양력을 잃고 급강하하기 시작한다.

 

오사카 국제공항에 착륙예정시각이었던 6시 56분경 뒤늦게 기체가 상승하기 시작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고

 

오른쪽 주 날개가 지면과 충돌하고 수직, 수평꼬리가 뜯겨나간뒤 기체 후부가 분리됐다.

 

분리된 객실 후부는 산의 능선을 넘어 경사면을 스쳐 지나갔고 평행에 가까운 각도로 착지해 수목을 쓰러뜨리며 천천히

 

감속했다. 이 덕분에 기적적으로 후부에 앉아있던 여성 4명은 유일하게 생존할 수 있게된다.

 

이후 기체 후부가 분리된 메인동체부는 잠시 상승했다가 우측으로 회전하며 타카마가하라산의 경사면에 반전하는 형태로

 

최종 추락, 산에 출동한 후 폭발하고 동체부의 탑승자들은 전원 사망한다. 추락 이후 요코타 기지와 도쿄컨트롤은 

 

무전을 시도하지만 응답이 없었고  구조대와 자위대에게 구조를 요청하여 수색을 시도한다.

 

추락 당시 비가 내리고 있었고 추락한 기체가 2차폭발을 일으키지않아 적지않은 사람들이 생존해있었다.

 

하지만 구조 활동이 시작된 다음날 9시가 되기전에 기체 후부의 여성 4명을 제외한 생존자 전원은 비오는 산 속의 추운 밤을 

 

견디지못해 저체온증과 심각한 부상으로 인한 쇼크로 사망하게 되었다.

 

결국 이 사고로 탑승인원 승객 509명 승무원 15명중 승객 4명을 제외한 520명이 사망하게 되었다.

 

-추락직전 마지막 123편의 모습, 수직꼬리날개가 없어진것이 보인다-

 



-산 능선에 충돌하여 폭발한 123편-

 



-생존자 4인 (위에서부터, 카와카미케이코:12세, 요시자키 미키코:8세, 요시자키 히로코:35세, 오치아이 유미:26세)-

-요시자키 미키코와 요시자키 히로코는 모녀지간이었다-

이후 미국에서 파견된 보잉사 조사단과 일본의 조사단은 사고경위를 조사하게되었는데

 

당시 123기는 사고 7년전 오사카 국제공항에 착륙하던 중 동체후부가 충돌하며 착륙하는 테일 스트라이크로 인해

 

후미가 파손되어 일본항공에서 수리가 불가능한 탓에 보잉에 정비를 의뢰한 기체였다.

 

-동체 후미에 뭔가 지저분한 흔적이 보인다-

 

 

수리시 규정대로라면 2줄의 리벳이 박힌 이중 철판으로 동체와 고정해야하는데 보잉의 기술자는

 

수리하며 보강판을 쪼개어 고정한 탓에 실런트 한 줄만으로 압력을 지탱해야하는 구조가 되어버렸다.

 

수리 이후 기압변화에 따른 금속피로가 누적되다가 위에서 언급한 벌크헤드가 터져나가며

 

비행기의 방향 안정성을 유지하는 수직 꼬리날개가 날아가버렸고, 기체를 조종하는 승강타, 방향타를 움직이는 

 

동력을 제공하는 유압 파이프가 날아가버리자 조종능력마저 상실해버린것이다.

 

테일 스트라이크 이후 동체가 약간 변형됐는데 사고직전까지 화장실문이 잘 닫히지 않는다든지, 바람이 새어

 

휘파람소리가 나는등의 결함이 있었다는 것을 보면 사고가 날 경고의 메시지를 꾸준히 날려줬다고 볼 수 있다.

 

 

사고 후 일본은 보잉측에 형사소송법에 따라 고발했지만 기각당하였고 일본항공은 피해자 측에 총 7억 8천만엔을

 

조의금 명목으로 지급했으며 회장은 퇴임했다. 또한 테일 스트라이크 당시 기장과 부실한 수리로 수백명의 목숨을

 

앗아간 정비 담당자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보잉측의 정비에 문제가 있었음이 명백했지만 일본항공이 보잉에게 책임을 전가한다는 소문이 한동안 돌았고

 

보잉이 주요고객인 일본항공을 보호하기 위해 책임을 뒤집어썼다는 소문마져 돌았다. 당시 일본에서는 일본항공에

 

책임을 전가하는 분위기가 팽배했다고 한다.

 

 

사고 1주기 직전인 1986년 8월 오스타카산 추락현장에는 위령비가 세워졌고 북동쪽 10km 지점에는 추모공원이 건립되었다.

 

추모공원에서는 매년 유가족과 공원이 있는 우에노무라 사람들, 일본항공 사장이 참석하는 추모식을 열고있다.

 

해가 갈수록 찾는 유가족의 수가 줄고있지만 추모식의 명맥은 36년이 지난 2022년 지금까지 유지되고있다.

 

 

-추모비와 추모공원-

 

 

일본항공 123편 추락사고 사망자들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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