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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하, 후계자가 필요합니다- 하나회와 윤필용 사건

후니의 궁금소 2023. 12. 24. 0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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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근래 영화 서울의 봄이 핫해지면서 12.12 군사반란을 주동한 하나회에 대해 세간의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하나회가 대중들에게 알려진 건 김영삼 정부 시절 있었던 '하나회' 숙군 당시 비로소 알려졌지만, 의외로 그 조직이 정부와 군사요인들에게 드러난 건 생각보다 빨랐다. 그 시초는 바로 이 인물 때문이었다. 

 

 



윤필용. 

 

육사 8기 생으로 박정희와는 5사단장 시절에 만나 참모로 그를 따라나섰다. 5.16 군사정변 당시에도 정변의 실세는 아니었지만, 박 전 대통령과 남다른 인연 덕에 권력 상층부에 끼었고, 20년간 최측근으로 그를 모셨다. 

 

심지어 1.21 사건 당시 생포공비 김신조가 '박정희 목을 따러 왔다는 말을 하는 바람에 전국이 뒤집어져 방첩대 사령관이었던 윤필용이 책임을 지고 20사단장으로 좌천됐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정희의 신임이 워낙 굳건해 다시 부활해 1970년에는 수도경비사령관(현 수방사 사령관)을 역임하고 있었다. 

 

이때 윤필용의 위세가 얼마나 기세등등했냐면, 군 인사권은 참모총장의 소관이었지만 박 전 대통령이 참모총장을 제끼고 윤필용과 군 인사를 논의했고, 구정에는 4성 장군들이 투스타인 윤필용의 집에 잘 보이기 위해 세배를 올 지경이었다. 

 

이 당시 세간의 사람들은 수경사가 있는 필동을 따서, 필동 육본이라 멸칭을 붙일 정도였다.

 

 




그러나 달도 차면 기우는 법...

 

1972년 10월 유신 이후 윤필용은 중앙정보부장 이후락과, 서울 신문 사장 신범식, 신진자동차 김창원 사장 재일교포 사업가 정건영 등과 함께 술을 마셨다. 

 

 

당시 이후락은 김일성을 만나 평양으로 직접 가 7.4 남북공동성명을 이끌어내는 등 언론과 대중들에게 자신의 입지를 공고히 하는 데 성공했다. 그런데 이때 윤필용이 "박정희 각하께서 연로하시니, 형님이 이제 후계자가 되셔야 한다", "신라 김춘추도 고구려를 목숨걸고 다녀와서 왕을 하지 않았느냐",  "영감이 혁명하셨을 때 나이가 몇이었느냐" 등의 소리를 했다.

 

(물론 윤필용은 이후락을 형님이라고 부른 건 사실이지만, 나머지는 철저한 날조라고 훗날 항변했다.) 

 



 

이 사건이 어쩌다보니 박종규 대통령경호실장에게 입수됐고, 박종규는 고~대로 대통령께 보고를 올렸다. 안 그래도 박종규는 중앙정보부장 자리를 누구보다도 탐내고 있었는데, 이를 이용하면 중정부장 자리를 얻을 수 있을 거라 여겼기 때문이었다.

 

 



1972년 11월 청와대 경내에는 통일을 염원하기 위한 절인 통일정사가 지어지고 있었는데, 박정희는 신범식 사장과 골프를 치던 중, "항간에 내 후계자 소문이 돈다던데 자넨 누군지 아나?"라고 추궁했다. 신 사장은 자칫했단 피바람이 불 것을 염려해 대충 얼버무렸지만, 박 실장이 머리에 총을 대고 위협하자, 결국 전말을 털어놨다. 그리고 이 타이밍에 통일정사는  이후락이 대통령이 되기 위해 풍수상 그 기를 받기 위해 짓고 있다는 보고와, 이후락의 동생이 수경사 근무 중령으로 발령난 것 역시 박정희의 의심병에 제대로 불을 지폈다.

 


(가운데가 손영길 준장, 맨 오른쪽이 윤필용 소장)

박정희는 강창성 보안 사령관에게 사건을 조사할 것을 명령했고, 이 결과 수경사 참모장 손영길 준장, 육본 인사실 김성배 준장, 육본 신재기 대령, 26기계화보병사단 76연대장 권익현 대령 등이 이른바 윤필용 계로 지목되어 단체로 군복을 벗고 횡령, 수뢰, 직권남용, 군무이탈 등의 범죄로 징역을 살았다. 

 




그런데 강창성 보안사령관은 이 과정에서 윤필용이 후원 중이었던 군대 내 사조직 '일심회' 즉 하나회의 실체를 알게됐다. 수사를 확대하기로 결심한 강창성은 하나회의 민간인 회원이었던 이원조(당시 제일은행 차장)를 잡아가는 등 하나회 조직을 파헤쳤고, 하나회 회원이었던 제1공수여단장 전두환은 이원조가 잡혀갔다는 소식을 듣고 안절부절했다. 

 

그리고 이때 전두환은 자신도 위험하다 생각해 같은 하나회 회원이었던 손영길의 구원요청을 거부했다. (훗날 손영길 본인은 전두환이 자신을 군대에서 내쫓으려고 처음부터 작당한 것이라고 주장)

 

좌우지간 강창성 보안사의 수사는 하나회 쪽으로 초점이 옮겨졌고, 73년 3월부터 7월까지 하나회 회원으로 의심되는 중견 장교들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전두환에게는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었으니, 그건 바로 그의 또다른 후원자였던 박종규 실장과 진종채 신임 수경사령관이었다. 두 사람은 강창성을 무너뜨리기 위해 보안사가 군용 휘발유를 빼돌려 민간인 업자들에게 팔아먹어 차익을 챙긴 사실을 알아내 바로 박정희에게 보고했고, 하나회를 자기 친위대로 키우려는 마당에 강창성이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들쑤시는 걸 못마땅하게 여긴 박정희는 당장 강창성을 보안사에서 해임하고 제3군관구사령관으로 좌천시켰다. 

 

이후 하나회 수사에서 강창성 보안사의 서슬을 피한 전두환, 노태우는 각각 공수여단장, 청와대 작전차장보, 사단장을 거쳤다. 

 

79년 10.26 이후 하나회는 다시 똘똘 뭉쳐 계엄사령관 정승화 대장을 가두는 12.12를 주도한다. 그리고 정권을 잡더니 강창성을 독직혐의로 체포했다. 

 

P. S 1:  이후 이후락은 중정부장 자리에 짤리는 건 모면했지만, '각하'의 신임을 완벽히 잃고 위세가 실추됐습니다. 그리고 이걸 만회하기 위해 저지른 것이 저 유명한 김대중 납치 사건. 하지만 미국이 알고 신속하게 대처하면서 국제 망신을 당했고, 이후락은 중정부장 자리에서 짤리고 말았습니다. 

 

P. S 2: 윤필용이 2010년 사망한 후 윤필용 사건이 보안사에 의해 고문으로 조작된 것이라는 이유로 2015년 윤필용의 아들이 건 재심에서, 혐의 대부분을 벗었습니다. 무려 42년만에... 그리고 손영길 준장 역시 무죄를 선고받고 5억 원을 보상 받았고, 손 준장은 이 돈을 모두 육사에 기부했습니다. 

 



(국회의원 시절의 강창성과 권익현)

 

P. S 3: 강창성은 먼 훗날 민주당에 전국구로 영입되어, 5공과 12.12 군사반란에 대해 야당의 저격수로 나섰는데, 당시 강창성이 보안사령관에 있었을 당시 윤필용 사건으로 찍혀, 감옥에 간 권익현 민자당 의원은 "XX, 제가 나를 보안사로 끌고 가서 (고문을 했을 때는) 영장 가지고 와서 집행했냐"며 들이받았습니다. 그리고 이 권익현 의원과 강창성 의원은 훗날 한나라당에서 다시 만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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