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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일전쟁으로 획득한 일본의 식민지, 가라후토(남사할린).
가라후토의 원주민으로는 아이누, 니브흐, 윌타가 있었는데 아이누족의 수는 대략 1,000~2,000명 사이, 니브흐와 윌타는 그 수를 합쳐 400명 정도에 불과했다.
워낙 수도 적고 비중이 없는 데다가, 원시적인 민족이라는 편견 탓에 이들은 '일본인' 취급이 아니라 '가라후토 토인'이라는 별도의 신분을 부여받았는데, 그나마 일본 본토 원주민이기도 한 아이누족은 1932년부터 일본인으로 신분이 바뀌지만, 니브흐나 윌타에 대한 취급은 일본 해방 때까지 유지됐다.
(윌타와 니브흐)
일본은 니브흐와 윌타를 일본인으로 동화시키겠다고 1926년부터 1927년까지 가라후토의 원주민을 일본인으로부터 격리시키는 강제이주정책을 실시한다. 그 결과 가라후토 시스카정에 일본판 원주민 보호구역이라 할 수 있는 '오타스의 숲'이라는 원주민 취락이 조성된다.
이 오타스의 숲에서의 동화주의 정책으로, 원주민들은 일본식 성씨와 이름을 가지고, 일본어를 배우고 천황과 국가에 대한 충성심을 강요받았다. 다른 한편으로는 일본에서 유일하게 원주민들이 민족 문화를 유지하며 생활할 수 있는 양면적인 마을이었다.
(위 사진처럼 시체를 풍장하거나 순록을 방목해 키우는 건 일본인이 사는 곳에선 불가능하다.)
어찌 보면 민족 문화를 유지하면서 '일본인' 의식을 심는 게 가능한가에 대한 실험적인 마을이기도 한 셈이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원주민 아이들은 자신의 민족언어를 말하는 것에 수치심을 느끼고 일본어를 말하고 스스로를 일본인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런 동화 교육에 가장 큰 일조를 한 인물이, 일본인 교사 '가와무라 히데야'이다.
(가와무라 히데야와 그의 제자들)
가와무라 히데야
가라후토 토인교육소의 교사였던 가와무라 히데야는, 1932년부터 15년 동안 오타스에서 원주민 학생들을 교육하였다. 여러 증언을 살펴 볼 때, 가와무라는 원주민 학생들에게 진심으로 존경과 사랑을 받은 듯 하다. (일본에게 배신감을 느낀 이들도 가와무라에 대해선 '정말 좋은 사람'이라고 얘기했다.)
가와무라는 사할린의 원주민을 일본인으로 동화시키겠다는 일본의 동화 정책에 맞게, 원주민 학생들에게 '훌륭한 황국 신민이 되는 법'과 '근면한 노동 정신'을 교육했지만, 동시에 원주민의 전통 문화와 언어도 소중히 여기는 양면적인 모습을 보여줬다.
예를 들어 아이들의 일본식 성씨와 이름을 지어줄 때 최대한 그들의 원래 성씨와 이름을 고려했고, 그들의 전통 수공예품 제작을 장려하고, 원주민 문화를 산더미 같이 기록하여 오타스를 찾는 관광객들에게 원주민의 문화를 자랑스럽게 얘기하기도 했다.
소련 영토인 북사할린에도 니브흐와 윌타가 살고 있었고 이들은 사할린이 반토막 난 상황에서도 국경을 넘어다니며 활동했기에 '대소련 스파이'로 유용하다고 평가됐다.
그래서 태평양 전쟁이 시작된 이후부터 남성 원주민들은 군사 훈련을 받게 되었고 소련 국경에서 소련군의 동향을 탐색하는 첩보 부대에 약 40명의 원주민이 배치되었다. 이 즈음 원주민 아이들은 존경하는 선생님의 '우리는 일본인'이라는 교육을 받았으니 거리낌 없이 일본군에 복무하게 되었다.
그러다 일본이 패전하고, 소련이 일본령 남부 사할린을 점령할 때 , 1947년 사할린의 모든 일본인이 사할린에서 일본으로 송환되었는데, 이 때 '일본인'이라고 교육받아 온 니브흐나 윌타는 '일본인이 아니다'라는 이유로 일본에서 사실상 유기했다.
가와무라 히데야의 사과
1947년, 일본으로의 귀국 직전에 가와무라는 제자들과의 마지막 만남에서 눈물을 흘리며 교육자로서 자신의 역할에 대해 사과하며 용서를 구했다. 그의 제자였던 윌타인, '기타가와 아이코'의 회상이다.
"선생님이 저에게 사과하면서 "내가 지금까지 가르친 모든 것은 잘못되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이제부턴 네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하면 된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래, 그렇게 하겠어. 나는 윌타로 돌아가지도, 일본인이 되지도 않겠어.' 그 때 저는 그렇게 다짐했습니다."
일본군에 복무한 니브흐와 윌타는 시베리아로 끌려가 혹독한 노동을 하다가 대부분 사망했고, 살아남은 이들은 러시아에서 '일본인'이라며 일본으로 추방했지만, 1965년에서야 일본 법원이 일본군에 복무했던 윌타와 니브흐족의 주거 권리를 인정해줬고, 끝까지 이들의 연금 및 기타 사회 보장 제도의 혜택을 인정해주진 않았다. ('일본인'이 아니었으므로, 현행법상 혜택을 줄 수 없음.)
(가장 왼쪽인 겐다누는, 일본군에서 복무했으나 보상을 받지 못했고 이후 일본에서 북방 소수민족 문화 보존을 위해 노력했다.)
결국 오타스의 양면성은 가와무라에겐 개인적인 패배감으로, 원주민들에겐 재앙적인 결과로 닥쳤다.
일본 내의 윌타나 니브흐는 20명 정도가 홋카이도 아바시리시에 정착했으나 지금은 모두 사망했고, 오늘날 일본에서 윌타나 니브흐 정체성을 갖는 이들은 없는 것 같고 아이누와 달리 이들의 피해는 대중 매체 등에서도 조명된 바가 거의 없다.
한편 가와무라가 기록한 북방 소수민족의 문화 자료는 일본으로의 귀국 도중 대부분 소실되어 현재는 남아있지 않다.
출처
On the Frontiers of H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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