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금소

어느 퇴역 군인의 실종 - 라이오넬 크립 실종사건

후니의 궁금소 2023. 11. 20. 2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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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ABC-Clio.com

 


냉전(Cold War/1947.3 - 1991.12)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 미국과 소련은 대립을 시작했다.

 

그들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라는 이념 아래, 총성 없는 전쟁을 시작했지만, 마냥 총을 갈고 닦고만 있지는 않았다.

 

 

그 총들을 '빌려주기' 시작했다.

 

 

그들 각자가 지원하는 세력들에 의해 대리전의 양상으로 이념의 전쟁을 진행했던 것이다.

 

이를테면 6.25 전쟁, 베트남 전쟁, 제 3세계 아프리카의 콩고 내전 같은 안타까운 전쟁들.

 

 

자본주의 미국의 영원한 우방, 영국도 이러한 대리전을 진행했다.

 

 

그러나, 이 대리전의 주체가 되기를 영국 당신도 거부했던걸 생각하면, 대리전이라는 말은 어쩌면 틀린 말인지도 모르겠다.

 

 

 

 

 


출처-wikipidia.org

 

라이오넬 크랩 (Lionel Kenneth Philip Crabb)

 

라이오넬 크랩은 영국 해군의 퇴역 군인으로, 최종 계급은 소령, 직별(육군으로 따지면, 주특기)은 '잠수' 였다.

 

 

그는 1941년 해군에 입대해 이듬해부터 굵직 굵직한 임무를 수행하며 군 수뇌부의 눈에 들기 시작했고,

 

1942년부터 크랩 소령은 해군의 기뢰 제거 및 파괴 임무를 맡게된다.

 

 

실제로 그는 지브롤터 해협에서 이탈리아 해군이 설치한 기뢰 제거 임무, 지중해에서 적 군함 파괴 공작을 수행하며, 

영국해군의 전설적인 스킨 스쿠버 다이버로 인정받는다.

 

 

또한, 1943년에는 조지훈장을 수훈하며 군인으로서 더할나위 없는 명예를 얻게되었고,

전쟁이 끝나고 2년 뒤인 1947년, 명예롭게 퇴역한다.

 

 

여기까지 본다면 바람직하고 명예로운 군인의 일대기를 보는듯 했다.

 

그러나,

 

 


출처-shutterstock.com

그는 군대를 잊지 못했다.

 

 

그 시절의 스릴 넘치던 임무에 비해 민간 잠수사는 너무 따분해서 그랬던 것일까?

 

매일 밤 그 때를 그리워 하며 술에 쩔어 지내게 된 것이다.

 

 

 

또한, 그는 자주 기행을 저질러 주변 이웃과 가족의 눈총을 샀는데,

 

군 시절의 기밀 임무에 대하여 떠벌리거나 과장을 섞어 자랑했고,

 

 

 

심지어 일상생활을 하고 수면할때 마저도 잠수복을 입고 지냈다.

 

 

 

결국 그는 1951년 해군에 복귀하여,

 

침몰한 잠수함 조사를 위해 잠수 하는등의 임무를 수행했지만, 그 동안의 폭음과 흡연으로 건강이 나빠져 다시 군을 떠났다.

 

 

 

모두가 이제 그는 더 이상 국가를 위해 잠수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몇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출처-seekPNG.com

 

놓칠수 없는 기회

 


크랩이 두번쨰 퇴역을 결정한 이듬해, 영국비밀정보국 (MI6)은 두 가지 첩보를 듣게 되는데,

 

 

 


출처-fineartamerica.com

하나는, 소련 서기장 니키타 후르쇼프가 정상회담을 위해 영국을 방문한다는것.

 

 

그리고, 그가 타고 올 소련 순양함, 오르조니키지 함이 포츠머스 항에 정박할 것이라는 첩보였다.

 

 

포츠머스 항이 영국해군의 앞마당 인점을 생각하면, 정보국으로서는 몹시 구미가 당기는 일이었다.

 

그러나, 1950년 중반에 맞지 않는 어색한 데탕트의 분위기에 영국정부는 단단히 일러두게 된다.

 

 

앤서니 이든 (영국 64대 총리)曰

 

"니들 마음대로 스파이 짓 하면 각오해라, 잠자코 엎드려 있어"

 

 

하지만 곧이곧대로 들을 정보국이 아니었다.

 

 

정보국은 고민했다.

 

 

 

현역 해군에게 스파이 활동을 맡기자니 실패할 경우 배후가 탄로날 테고, 생판 민간인에게 맡기자니 보안이 걱정이었다.

 

그떄, 열심히 고민하던 정보국의 레이더망에 불현듯 잡힌 사람이 있었는데,

 

 

 

라이오넬 크랩 이었다.

 

 

 

그는 민간인이지만 늘 군대의 아찔한 임무를 그리워했고, 원래 기행으로 유명한 자이니, 비밀을 누설해 버린대도

 

사람들은 신경쓰지 않을것이다.

 

 

거기다가 그의 다이버 실력이야 두 말하면 입 아플 터였다.

 

 

정보국의 입장에서 크랩은 이 대리전을 맡아줄 적임자 였고,

 

 

역시 예상대로 그는 정보국의 제의를 흔쾌히 수락한다.

 

 

 

작전개시

 

 

 

결국 정보국이 어떻게 그에게 접근하여 제안을 했는지는 알수 없지만, 

 

흐루쇼프의 영국 입성 하루 전인 4월 17일, 정보국 요원(버나드 스미스)과 함꼐 포츠머스의 호텔에 방을 잡았다.

 


출처-Wilsoncenter.com

 

4월 18일, 흐루쇼프는 예정대로 포츠머스에 입항했고, 영국 시민의 환대속에 런던으로 출발했다.

 

크랩 역시 호텔을 나서서 포츠머스의 항구로 출발했다.

 

 

 

18일 당일은 시험 잠수로 오르조니키지 함의 근처를 잠수하며 동태를 살폈고,

 

 

4월 19일, 그는 잠수를 시도했으나 몇 분만에 떠올랐다.

 

등에 메고있던 산소통의 탄산가스 문제였다.

 

 

탄산가스를 제거한후, 늘 그랬듯이 크랩은 웃으며 잠수했고, 다신 떠오르지 않았다.

 

 

 

결말

 

 

4월 29일, 흐루쇼프는 영국에서의 모든 일정을 끝내고 소련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 다음날, 영국 해군성은 퇴역군인 크랩 소령이 '잠수기구 시험 중 사고로 사망' 한것 같다는 공식 발표를 내놓았다.

 

 

 

의회의 의원들과 기자들은 사건의 진실을 끊임없이 추궁했으나,

 

 

영국 정부와 해군성은 '크랩소령이 독단적으로 일을 벌이다 사고로 사망했고, 국익에 위배되는 사항이니, 그 이상 말할수 없다'는 말만 되풀이 했다.

 

 

 

결국 이러한 발표에 진실은 덮히는듯 했고, 크랩과 마지막까지 같이 있었던 버나드 스미스요원은 기자들을 피해 잠적했다.

 

 

 

이렇게 크랩은 사람들의 기억속에서 잊혀지는듯 했다.

 

 

 

 

치체스터의 목 없는 시체

 

 

흐루쇼프의 정상회담으로부터 1년 하고도 2개월이 지난 1957년 6월 9일.

 

포츠머스로부터 얼마 떨어지지 않은 치체스터의 필시 섬에서 한 구의 시신이 발견된다.

 

 


출처-Gopili.com/치체스터와 포츠머스의 직선거리

 


시체는 물에서 오래 있었는지 퉁퉁 불어었고, 특이사항이라면 잠수복을 입었으며,얼굴과 손이 잘려있었다.

 

 

사람들은 잠수복을 입은 시체가 1년전 사망했다는 크랩인지에 대해 주목했고,

 

 

치체스터의 검시관은 크랩의 주변안물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시체와 증언을 대조했다.

 

 

시체는 얼굴과 손이 없었기에 신원파악이 어려웠지만, 증언 속 크랩의 흉터위치, 기형으로 구부러진 발가락,

 

이태리제 피렐리 잠수복, 머리가 있다고 가정할 시, 거의 비슷한 키를 바탕으로 시체가 크랩의 것이라고 결론내린다.

 

 

 

그러나 신원을 파악 할때 가장 중요하게 여겨지는 지문, 얼굴, 치아가 없었기에,

 

많은 사람들이 이 시체가 크랩의 것인지 의문을 가지게 된다.

 

 

 

가장 큰 의문은 사고로 죽었다는 크랩이 왜 머리와 손이 잘려져 발견되었냐는 것 이었다.

 

이로 인해 사람들은 그의 죽음에 대해 많은 가설, 혹은 추측을 내놓게 되는데,

 

 

1. 크랩은 소련에게 발각되어 살해당했다?

 

 

어쩌면 지금까지의 정황을 보았을때 가장 근접해 보이는 세가지 가설로, 

 

'크랩은 4월 19일 당일, 오르조니키지 함을 정찰하다가 함 하부, 혹은 함 상부에 설치된 방어장치에 걸려들어 익사했다'

는 가설과,

 

 

'반 소련세력이 후르쇼프의 암살을 위해 함 하부에 수중 폭발물을 설치해 두었는데 재수없이 걸려든 크랩이 폭발물에 의해 폭사했다, 그 덕분에 머리와 손이 사라진것이다' 라는 가설이다.

 

 

 

마지막 가설은 비교적 최근인 2007년 [데일리 미러]의 보도자료로, 전직 소련군인 Eduard Koltsov가 증언하기를,

 

'크랩은 오르조니키지 함 하부에 기뢰를 설치하려다 붙잡혔고, 

 

 

소련 해군에 의해 얼굴과 손이 잘려 바다에 버려졌다'는 다소 충격적인 내용이다.

 

Koltsov는 덧붙여 보여주기를 목과 손을 절단 할때 사용했던 단검과 그로 인해 받은 훈장을 취재진에게 보여줬다고 한다.

 

 

 

 

2. 시체는 크랩이 아니며, 크랩은 소련으로 끌려갔다?

 

 

혹자는 치체스터의 시체는 크랩이 아니고, 

 

크랩은 작전도중 소련 해군에 의해 발각되어 소련으로 끌려 갔을 것 이라고 주장했다.

 

 

 

그 이유로 든 것은 한 소련 군사 잡지에 실린 소련 해군 장교들의 사진 때문인데,

 

사진속 장교들, 그 중 한 명이 크랩과 굉장히 닮았다는것.

 

 

 

실제로 사진이 흐릿하긴 하지만, 크랩의 전 부인과 크랩의 친구 역시 그가 맞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런 일이 있었다면 소련은 선전용으로 크랩을 사용 했을거라며 부정적으로 보는 의견도 많았다.

 

 

 

3. 크랩은 소련에 의해 심문 당했다?

 

 

소련의 영국 내 스파이중 한명이었던 해리 휴튼이 쓴 책에서 서술한 내용 중, 

 

그의 러시아인 지인이 어떻게 크랩이 죽었는지를 알고있다며 말하기를,

 

 

크랩이 잠수하기전 소련 해군은 오르조니키지 함이 영국에 도착한 이후, 잠수를 통한 첩보활동의 가능성을 파악하고,

항구에 정박 중 수면 아래에 대한 경계를 강화했는데,

 

 

때 마침 잠수 용품의 결함으로 정신을 잃은 크랩을 오르조니키지 함 승조원이 발견하여 끌어올렸고,

 

크랩을 치료한 뒤, 심문을 시작했지만 크랩은 다시 정신을 잃고 사망했다는것.

 

 

 

그로 인해 크랩의 죽음에 대한 여론의 책임을 지게 될까봐 두려워진 소련 해군이 시신을 바다에 유기했고, 

 

크랩의 시신은 14개월간 수초에 걸려 있다가 결국 떠오르게 되었다는 주장이다.

 

 

 

 

그 외에도 크랩이 소련의 이중 스파이 였다는 설, 

 

크랩이 소련으로 망명을 원해 영국 정보부가 살해 했다는 가설 등 많은 추측들이 오고 가는 가운데,

 

 

 

어쩌면 진실은 영영 알수 없을지도 모른다.

 

 

 

 


출처-Dailymail.com

 

 

1956년 4월 19일, 라이오넬 크랩에겐 무슨일이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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