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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알려지지 않은 '10.26사건'의 대법원과 대법관 이야기

후니의 궁금소 2024. 1. 6. 0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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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영섭 전 7대 대법원장 "회환과 오욕의 역사"

 

 

(사형 직전의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 모습)
 
 
 
1981년 4월 15일, 이영섭 대법원장은 5공화국 헌법이 발효됨에 따라 대법원장직에서 물러났다. 그의 후임은 10.26 사건의 전원합의체 주심이었던 유태흥 대법관이었다.
 
그는 손수 쓴 퇴임사에 "사법부는 행정부의 일개 부처에 불과하다"는 문구를 남겼다.
그리고 대법원에서 20년 근무한 삶을 되돌아보며 이러한 말을 남기고 떠났다.
 
"오늘 지난날을 되돌아보면 모든 것이 회환과 오욕으로 얼룩진 것이었습니다."
 
 
 
 
2. 내란 목적 살인이다 vs 일반 살인이다
 
1980년 3월, 10.26사건 당사자들에 대한 재판이 대법원 형사 3부에 배당된다.
형사 3부의 주심은 유태흥 대법관이었다.
 
대통령이 살해된 사건이었기 때문에 이례적으로 대법원의 모든 대법관들이 심리했다.
형사 3부의 주심 대법관은 김재규의 상고를 기각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다른 대법관들은 그의 의견에 쉽게 동의하지 않았다.
 
결론을 내리지 못하자, 대법원은 1980년 4월 10일 '전원합의체'로 다시 배당한다.
 
 
 
 
3. 대법원 앞에 탱크를 배치한 신군부
 
결국 대법원 전원합의체의 대법관들은 합의에 이르지 못하고 표결을 했다.
김재규의 상고에 대해 기각할 것인지 결정하기 위해서였다.
1980년 4월 28일, 8대 6으로 상고 기각 결정을 했다.
 
1980년 5월 20일, 김재규에 대한 대법원 선고 재판이 열렸다.
 
선고 공판이 열린 날에 신군부는 대법원의 대법관들과 대법원장이 신군부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을 것을 우려해서 탱크를 동원했다.
 
탱크가 대법원을 바라보고 있었다.
 같은 시각,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상고 기각 결정에 따라 김재규 재판을 끝낸다.
 
 
 
 
4. 소수의견을 굽히지 않은 양병호 대법관을 보안사 서빙고실로 끌고 간 신군부
 
대법원 판사들 중 서열 2위였던 양병호 대법관은 신군부가 요구한 '내란목적 살인'에 동의하지 않았다.
 
김재규 재판이 끝나고 시간이 흘러 8월초 신군부의 보안사는 집에서 밥을 먹고 있던 양병호 대법관을 서빙고실로 납치했다.
양병호 대법관은 서빙고실에서 고문을 받았고 사표를 강요받았다.
 
며칠 후 법원행정처장 앞에 군인이 나타났다.
그 군인은 법원행정처장에게 '양병호 판사의 자필 사표'를 건네줬다.
 
법원행정처장은 대법원장을 찾아가 양 판사의 사표를 건네며 이렇게 말했다.
 
"이걸 원장님께서 수리해주셔야 양 판사가 살아서 나올 수 있습니다."
 
대법원장은 양 판사를 생각해서 사표를 수리했고 사표를 수리한지 한 시간만에 양병호 전 대법관은 대법원장 앞에 나타났다.
법률신문사의 <법조야사>에 따르면, 풀려난 양병호 전 대법관은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눈에 초점이 풀려있었다고 한다.
 
 
 
 
5. 소수의견을 낸 6명의 대법관 전원이 대법원을 떠났다
 
보안사의 사표 요구를 거부하자 서빙고실로 끌려간 양병호 전 대법관이 대법원을 가장 먼저 떠났다.
이어서 서윤홍 대법관은 자신을 찾아와 대법관 사직서를 제출하라는 '국보위 직원'에게 반발하며 "사표를 쓰더라도 당신이 아닌 대법원장에게 낼테니 가라"고 말했다.
 
서윤홍, 민문기, 임항준, 김윤행 대법관의 사표는 8월 9일 수리됐다.
정태원 대법관은 5공화국 대법원 구성에서 탈락하여 옷을 벗었다. 
 
쫓겨난 양병호 전 대법관 등은 변호사 개업조차 방해 받았다.
 
양병호 전 대법관 등을 업무적으로 지원했던 법원 공무원들도 신군부로부터 사표를 강요받아 법원을 떠났다.
 
 
 
 
 
6. 이영섭 대법원장이 신군부 수장으로부터 들었던 말
 
대통령의 취임을 축하하는 자리에 이영섭 대법원장이 초청받았다.
전두환은 그 자리에서 이영섭 대법원장에게 이렇게 말했다.
 
"김재규 사건을 늦게 마무리 짓는 바람에 5.18 광주사태가 터졌다."
"국사범을 처리하는데 무슨 놈의 법관들 합의가 필요하냐, 정신 나간 대법원판사들 그냥 쓸어버리자고 말한 군 장성도 있었는데 내가 말렸다."
 
그리고 1980년 연말 송년회에서 술에 취한 전두환은 이영섭 대법원장에게 "그때 재판 때문에 내가 대법관들의 집을 전부 확인하고 알아뒀소"라고 말했다.
 
 
 
 
7. 이일규 전 10대 대법원장 " 어차피 내란목적 살인이든 일반 살인이든, 김재규 사형은 틀림없었다"
 
다수의견 8명은 내란목적 살인을 인정했다. 그러나 소수의견 6명은 내란죄로 처벌할 수 없고 일반 살인으로 처벌해야 한다고 끝까지 주장했다.
다수의견 8명 중 한 명이었던 당시 이일규 대법관은 훗날 "이론적으로는 소수의견이 옳지만 어느 쪽으로 봐도 사형인데 내란목적이냐 일반 살인이냐는 중요하지 않다"고 말했다.
 
 
 
 
8. 다수의견을 낸 8명 중 4명은 대법원장을 역임
 
유태흥 전 대법원장은 한국 역사상 최초로 대법원장에 대한 탄핵 소추 결의안의 당사자가 됐으며
유태흥 전 대법원장의 후임으로 임명된 김용철 전 대법원장은 법관들의 집단 요구로 임기 중 사퇴했다.
 
김용철 전 대법원장의 후임 임명이 어려워진 1988년 청와대는 또 다시 사법파동을 겪지 않기 위해 이일규 전 대법관을 찾아간다.
10.26사건을 직접 다룬 이일규 전 대법관은 '사법부의 독립'을 조건으로, 청와대가 제안한 대법원장직을 수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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