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축구 정보

불가사의한 로마 황제, 그의 방식대로 ‘성묘의 수호자’

후니의 궁금소 2023. 12. 21. 11:05
반응형

1225 31세의 신성로마황제, 시칠리아 왕 프리드리히 2(1194년생) 13세의 예루살렘 여왕 이사벨 2( 1212년생, 계보로 보면 유명한 예루살렘 왕 보두앵 4세의 이복여동생의 외손녀)와 결혼했다. 프리드리히의 적들은 그가 새 황후의 시녀들을 유혹하는 한편 사라센 창녀들의 하렘을 만들어 놀아났다고 주장했다. 이는 여왕의 아버지 브리엔의 장을 놀라게 했고 교황을 실망시켰다. 그러나 프리드리히는 이미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군주였으며 모든 일을 자신의 방식대로 해냈다. 이제 예루살렘 왕이 된 프리드리히는 섭정 역할을 하던 장의 권리를 그에게 양도하도록 했다. 당대의 연대기는 분개한 장의 반응을 묘사했다.

 

 

 

 
 
 

반은 독일인이자 반은 노르만인이었던 호엔슈타우펜의 프리드리히는 시칠리아에서 자랐다. 팔레르모 궁정은 그리스도교와 이슬람을 고유하게 혼합시키면서 노르만, 아랍, 그리스 문화를 결합했다. 프리드리히를 독특한 사람으로 만든 것은 이와 같은 양육 환경이었는데 프리드리히 또한 자신의 기벽을 자랑했다. 그의 수행단은 술탄식 하렘, 동물원, 50마리의 매 조련사들(프리드리히는 새를 이용한 사냥기술 The Art of Hunting with Birds이라는 책을 썼다), 아랍인 호위병, 유대인 및 무슬림 학자들로 구성되었으며, 때로는 스코틀랜드 마법사와 그리스 사제도 포함되었다. 확실히 프리드리히는 그리스도교 세계의 다른 어떤 왕보다 문화적으로 레반트인다웠다. 그러나 그것이 그가 시칠리아의 아랍 반란군을 무자비하게 탄압하는 것을 막아내지는 못했다. 프리드리히는 포로가 된 아랍 반란군 대장의 배를 쇠갈고리를 이용하여 자신이 직접 갈랐다. 프리드리히는 시칠리아에서 아랍인들을 내쫓았지만 루체라에 새로운 아랍 마을을 지어주고 모스크와 궁전들을 두었다. 그 궁전은 프리드리히가 가장 아끼는 거처가 되었다.

 

 

그러나 프리드리히를 삼킨 것은 이국적 취미가 아니라 권력이었다. 프리드리히는 두 번이나 그를 파문하고 적그리스도로 비난했으며 온갖 기이한 중상모략을 이용해 협박했던 질투심 많은 교황에게 맞서 발트 해에서 지중해까지 이르는 광대한 영토를 방어하는 데 일생을 바쳤다. 프리드리히는 자신과 가문의 권리를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그는 사실 자신이 황제로서 비잔틴을 모범으로 하는 보편적인 거룩한 군주가 되어야 하고, 십자군의 후예이자 샤를마뉴의 후계자로서 예루살렘을 해방시켜야 한다고 믿는 전통적인 그리스도인이었다.

 

 

이제 프리드리히는 진지하면서도 당연히 자신의 스타일에 맞는 원정 계획을 세웠다. 그는 황후(예루살렘 여왕)를 팔레르모의 하렘에 두었는데, 그녀는 남편에 의해 은둔 생활을 했다. 교황에게는 십자군을 이끌고 출발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런데 황후가 아들을 낳은 후 죽었다. (14세 때 여왕은 요절한 딸을 낳았고 16세 때에 아들을 낳고 출산 합병증으로 사망했다.) 프리드리히는 결혼을 통해 예루살렘 왕이 되었으므로 이제는 아들이 예루살렘 왕이 되어야 했다. 그러나 프리드리히는 그런 세부적인 일이 새로운 방식의 십자군을 방해하게 하지 않았다.

 

 

 
 

 

프리드리히는 살라딘 궁정의 라이벌들을 이용해 예루살렘을 차지하고자 했다. 살라딘의 조카 술탄 알-카밀은 예루살렘을 차지하고 있던 무아잠을 쫓아내도록 도와주면 그 대가로 예루살렘을 주겠다고 프리드리히에게 제안했다. 1228년에 무아잠이 죽고 카밀이 팔레스타인을 점령했다. 카밀이 프리드리히에게 했던 제안은 철회되었다. 그러나 카밀은 무아잠의 아들, 그리고 프리드리히와도 싸워야 했다. 카밀은 양쪽 모두의 위협을 감당할 수 없었다. 황제와 술탄은 예루살렘을 놓고 싸우기엔 너무 힘이 없었고, 따라서 비밀협상을 시작했다. 카밀은 프리드리히만큼이나 전통과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소년시절 카밀은 잉글랜드의 리처드 1세 왕에게서 직접 기사 작위를 받았다. 

 

 

황제와 술탄이 예루살렘의 분할을 협상하는 동안 그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과 아랍의 기하학에 대해서 논쟁했다. 프리드리히는 카밀의 특사에게 말했다. “나는 예루살렘을 차지할 야심은 없다네. 단지 나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평판을 유지하고 싶을 뿐이네.” 무슬림들은 그가 그리스도교를 그저 하나의 도박으로 여길 뿐이라는 사실에 놀랐다. 술탄은 황제에게 무희들을 보냈고 황제는 그리스도교 무희들로 무슬림 손님들을 즐겁게 했다. 대주교 제롤드는 프리드리히의 가수들과 광대들을 그리스도인들의 입에 담을 수 없는 천하고 부끄러운 사람들이라고 깎아내렸고 그 후에도 비판을 계속했다. 이 기간에 프리드리히는 매사냥을 하고 새로운 정부들을 유혹하며 정부들 가운데 하나를 위해 음유시를 연주했다. ", 나는 나의 숙녀와의 달콤한 동행을 추억하면서 그녀와 떨어져 있는 것이 그토록 힘든 일인 줄을 몰랐네. 행복의 노래여, 시리아의 꽃에게로, 나의 심장을 가두어둔 그녀에게로 가라. 그녀가 시킨 모든 일을 완수할 때 까지 그녀의 사랑으로 인해 고통 받을 종을 기억해달라고 그 사랑스러운 여인에게 간청해다오.”

 

 

협상이 지연되자 프리드리히는 발밑까지 군대를 전진시켜 예루살렘을 위협했다. 전략은 통했다. 1229 10년간의 평화를 조건으로 카밀은 해안으로 가는 길목과 함께 예루살렘과 베들레헴을 양보했다. 무슬림은 예루살렘에서 성전산을 소유하며 카디의 지배 아래 출입과 예배의 자유를 갖는다. 이 공동주권협약은 예루살렘 역사상 가장 대범한 평화협상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다마스쿠스에서 무아잠의 아들은 공개적인 호곡을 명했다. 군중들은 그 소식을 듣고 흐느껴 울었다. 카밀은 우리는 일부 교회들과 폐허가 된 집을 내주었을 뿐이다. 성소 구역들과 바위 돔은 여전히 우리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협상은 카밀에게 이롭게 작용했다. 카밀은 자신의 왕권 아래에 살라딘의 제국을 재통합할 수 있었다. 대주교 제롤드는 예루살렘을 방문한 자를 파문하는 것을 금지시켰고 성당 기사들은 성전산을 회복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프리드리히를 비판했다.

 

 

3 17일 프리드리히는 술탄의 대변인이자 나블루스의 카디, 샴 알 딘과 만났다. 샴 알 딘은 프리드리히에게 예루살렘의 열쇠들을 내주었다. 구호 기사단장의 저택에서 밤을 보낸 후 프리드리히는 사제들은 없고 군인들이 가득한 성묘교회에서 특별예배를 했다. 그는 칼바리 제단에 왕관을 바친 다음 다시 자기 머리에 썼다. 이는 자신을 그리스도교 세계 전체의 최고군주로 내세우기 위한 대관의식이었다. 그는 잉글랜드의 헨리 3(상술한 리처드 1세의 조카)에게 이렇게 설명했다. “우리 가톨릭 황제들은 전능한 신께서 그의 왕좌로부터 우리에게 주신 왕관을 쓰고 있으며 신의 특별한 은총으로 우리는 신의 종 다윗의 집에서 세계의 왕자들 가운데 가장 높은 자리에 올랐습니다." 프리드리히는 자신의 중요성을 과소평가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의 무대연출은 다윗 왕의 성전을 대신한다고 여긴 성묘교회에서 거룩한 왕, 마지막 날의 신비주의적 황제에게 왕관을 씌우는 것이었다.

 

 

그 후 황제는 성전산을 돌아보았고 바위 돔과 알아크사를 경이롭게 바라본 뒤 아름다운 미흐라브를 칭송하고 누르 알 딘의 민바르로 올라갔다. 프리드리히는 신약 성서를 들고 알아크사로 들어가려는 한 사제를 발견했을 때 그를 넘어뜨리고는 이렇게 말했다. “돼지야! 신께 맹세컨대, 너희들 하나라도 허락 없이 이곳에 들어오면 그 눈을 뽑아버리겠다!" 무슬림 관리자들은 이 괴짜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를 몰랐다. 무슬림 관리자들 가운데 한 명은 눈치 없게도 그가 노예였다면 200디르함의 가치도 없을 텐데라고 중얼거렸다.

 

 

그날 밤 프리드리히는 무에진들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술탄의 대리인에게 말했다. “카디여, 지난밤에는 왜 무에진들이 예배신호를 내지 않았는가?” “제가 무에진들에게 폐하를 위해 예배신호를 내지 말라고 권고했습니다.”라고 카디는 대답했다. “옳지 않다.” 프리드리히는 대답했다. “내가 예루살렘에서 밤을 지내는 것은 주로 무에진들의 예배 소리와 한밤중 신께 올리는 찬송 소리를 듣기 위함이었다.” 적들은 프리드리히를 이슬람 혐오자라고 생각했지만 프리드리히는 어쩌면 그의 독창적인 협상안을 확실히 적용하는 데 더 관심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무에진들이 한낮 예배 시간을 알리자 모든 시종과 시동들, 교사들까지도 예배를 위해 엎드렸다. 그날 아침 카이사레아의 주교가 자신의 파문령을 가지고 도착했다. 황제는 다윗 탑에 있는 수비대를 떠나 아크레로 돌아갔다. 프리드리히는 그곳에서 귀족들과 성당 기사들의 적대에 직면한다. 이제 이탈리아 교황의 공격을 받는 상황에서 황제는 은밀하게 출발을 계획했다. 그러나 5 1일 새벽, 아크레의 폭력배들은 정육점 거리에서 동물들의 내장을 모아다가 프리드리히에게 던졌다. 배를 타고 돌아가면서 프리드리히는 시리아의 꽃을 몹시 그리워했다. “떠나온 이후로 이 배에 오를 때처럼 고통스러웠던 적이 없었다. 이제 나는 그녀에게 곧바로 돌아가지 않으면 틀림없이 죽으리라는 것을 믿는다.”

 

 

오래 머무른 것도 아니었고 다시 돌아오지도 않았지만 프리드리히는 공식적으로 10여 년간 예루살렘의 주인이었다. 프리드리히는 다윗 탑과 왕궁을 독일 기사단에게 주었다. 프리드리히는 독일 기사단의 단장인 헤르만과 윈체스터의 주교 피터에게 다윗 탑을 수리하도록 명하고 성 스데반 문을 강화하도록 명했다. 프리드리히와 카밀은 우정을 유지했다. 술탄은 황제에게 보석이 박힌 천문관을 보냈다. 천문관은 시계인 동시에 움직이는 하늘 지도였다. 그리고 코끼리도 보냈다. 프리드리히는 카밀에게 북극곰을 보냈다. 프리드리히는 남은 생애 동안 독일과 이탈리아의 이중 계승을 지키기 위해 교황들과 끊임없이 싸웠다. 교황들은 <계시록>의 짐승들과도 같이 프리드리히를 자극했다. 프리드리히의 장남 하인리히가 그를 배신했다. 프리드리히는 아들을 평생토록 감옥에 가두었고 예루살렘 여왕의 아들 콘라트를 자신의 후계자로 임명했다. 이 불가사의한 황제(나중에 프리드리히는 스투포르 문디[Stupor Mundi], 세계의 불가사의라 불렸다) 1250년 이질로 죽었고 팔레르모에 묻혔다. 시간이 흐르면서 자유주의자들은 그의 현대적 관용을 칭송했다. 한편 히틀러와 나치는 그를 프리드리히 니체가 말한 초인으로 숭배했다.

 

 

<프리드리히 2세의 가정>

 




 1황후 : 아라곤 공주, 전 헝가리 왕비 콘스탄사 (결혼 : 1209-1222) 

- 독일왕(로마왕), 시칠리아 왕, 이탈리아 왕 하인리히 (7) 

 

 2황후 : 예루살렘 여왕 이사벨 2 (결혼 : 1225-1228)

- 마르가레타 

- 독일왕(로마왕), 시칠리아 왕, 이탈리아 왕, 예루살렘 왕 콘라트 4 : 최종 후계자

 

 3황후 : 잉글랜드 공주 이사벨라 (결혼 : 1235-1241) 

[존 왕의 딸이다.] 

- 요르단

- 아그네스

- 하인리히

- 마르가레타 

 

 비앙카 (결혼 : 1246)

[이 결혼은 그녀의 임종 중에 이뤄졌기에 교회법적으로 공인되지 않았다. 다만 프리드리히는 자녀들을 적출로 대우했다.]

- 니케아 황후 안나(요안니스 3세의 2황후)

- 시칠리아 왕 만프레디

- 비올란테

 

이외에도 여러 애인들과 여러 사생아를 두었다. 

 

 

 

[참고 자료, 도서]

Frederick II, Holy Roman Emperor  Isabella II of Jerusalem

https://en.wikipedia.org/wiki/Frederick_II,_Holy_Roman_Emperor

https://en.wikipedia.org/wiki/Isabella_II_of_Jerusalem

사이먼 시백 몬테피오리, 예루살렘 전기, 시공사, 2012.

https://www.google.co.kr/books/edition/%EC%98%88%EB%A3%A8%EC%82%B4%EB%A0%98_%EC%A0%84%EA%B8%B0/j9PREAAAQBAJ?hl=ko&gbpv=0

 

[참고 이미지] 

Cultural depictions of Frederick II, Holy Roman Emperor

https://en.wikipedia.org/wiki/Cultural_depictions_of_Frederick_II,_Holy_Roman_Emperor#Visual_arts

 
반응형